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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저자: 나광자
- 출판사: 미디어
- 출판 연도: 2023년 06월
안녕하세요, 피아니스트 나광자 교수님의 회고록을 소개해 드리려 합니다. 1세대 피아니스트로서 대한민국 음악계의 발전에 기여하신 나광자 교수님의 80년 인생 이야기를 담은 책입니다. 책을 읽으면서 나광자 교수님의 음악과 삶에 대한 열정과 사랑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음악을 좋아하는 분들이라면 누구나 즐겁게 읽을 수 있는 책이라고 생각하여 추천드립니다
도서소개
피아니스트 나광자 교수는 대전에서 태어나 서울대학교 음악대학 기악과를 졸업한 후 부산대학교 사범대학 음악교육과에 재직했다. 부산대학교 예술대학 음악학과 교수 재직 중 예술대학 학장을 역임했으며, 부산 피아노듀오협회 회장, 한국피아노학회 부산영남지부 회장 등을 지냈다.
한평생 피아니스트로, 교육자로 활발히 활동한 나광자 교수는 부산, 서울 등지에서 17여 회의 개인 독주회를 개최했으며 대만, 미국 노스웨스턴대학교, 하와이 등 해외에서도 독주회를 가졌다. 부산시립교향악단과의 두 번의 협연을 비롯하여 서울 국립교향악단(현 KBS교향악단), 오스트리아 잘츠부르크 신포니에타 등과 협연하였다.
이 책은 자연인 나광자 교수의 개인사부터 피아니스트로 살아오며 그가 부산 음악계에 남긴 무수한 발자취를 담았다. 6?25전쟁, 4?19혁명, 5?16군사쿠데타 등 근대사의 굵직한 사건을 지나온 개인의 소회는 물론, 음악대학조차 찾아보기 힘들던 시절 우리나라 1세대 피아니스트로이자 교육자로 활동하며 만나게 된 음악사의 일면 또한 엿볼 수 있다. 정진우, 제갈삼, 이상근 등 대한민국을 대표하는 피아니스트들과의 인연을 비롯해 대청장 연주홀, 산업대학 콘서트홀, 부산시민회관과 문화회관, 부산대학교 음악관 등 부산지역 연주홀의 생생한 역사 또한 담고 있다.
나광자 교수는 이 책을 통해 사랑받는 아내이자 며느리, 어머니로서 건강히 가정을 꾸리고 피아니스트로서 수많은 공연을 이어올 수 있었던 80년 세월이 마치 하나님의 선물 같았다 회고하며 감사하는 마음을 전했다.
저자 소개
1942년 출생. 서울대학교 음악대학 기악과를 졸업한 후 부산대학교 사범대학 음악교육과에 재직했다. 부산대학교 예술대학 음악학과 교수 재직 중 예술대학 학장을 역임했으며, 부산 피아노듀오협회 회장, 한국피아노학회 부산영남지부 회장 등을 역임했다.
부산, 서울 등지에서 17여 회의 개인 독주회를 개최했으며 대만, 미국 노스웨스턴대학교, 하와이 등 해외에서도 독주회를 가졌다. 부산시립교향악단과의 두 번의 협연을 비롯하여 서울 국립교향악단(현 KBS교향악단), 오스트리아 잘츠부르크 신포니에타 등과 협연하였다. 그 외 많은 협주와 듀오 연주, 반주 등 현재까지도 꾸준한 연주 활동을 이어가는 현역이다.
음반 작업도 활발히 진행한 나광자 교수는 2000년 쇼팽의 마주르카 51곡 전곡을, 2001년 부산 출신의 작곡가 이상근 피아노곡을 악보와 함께 CD로 출반했다. 그 외 석사논문을 비롯해 3개의 논문이 있다.
줄거리
친가에서 25년
초등학교 시절
기억에 남는 선생님 중 음악 선생님이었던 이문주 선생님이 있다. 피아노를 잘 치시고 노래를 잘하는 그 분은 그야말로 다재다능하셨다. 동요집도 많이 내고 이후 대통령상까지 받은 동요 작곡가이시기도 하다. 선생님이 만든 합창반이 특히 기억에 남는다.
선생님께서 가르쳐주신 노래 중 ‘올드 블랙 조(Od Black Joe)가 아직도 기억에 생생하다. 당시 선생님께서는 영어 가사를 한글로 써서 외우게 했고, 실제로 미군 부대에 가서 부르기도 했다. 미군들의 향수를 달래는 위문공연 때였다. 까마득한 기억이지만 쏟아지던 박수갈채를 아직 잊을 수가 없다.
이문주 선생님은 그 후 서울로 가셔서 리라초등학교 교장 선생님까지 하셨다. 1998년 서울 예술의전당에서 열린 내 독주회 때도 오셨다. 내가 어릴 때엔 학교 선생님이 과외 특별지도를 하셔도 봉사로 즐겨 하셨을 뿐 지도비를 받는 일은 없었다. 저녁 늦게까지 붓글씨 지도를 특히 방학 때 받거나 할 때 오히려 간식을 사주시는 쪽이었다.
피아노 공부 시작
5학년 때였다. 언니가 어느 은행장 댁 사모님께 피아노를 배운다고 했다. 그 시절에는 피아노가 있는 집은 거의 없었다. 어느 날 언니가 날 보고 “너 피아노 배워볼래?” 하고 물었다. 매일 같이 시끄럽게 노래를 불러대니 음악 쪽에 관심이 있을 거라 생각했던 모양이다. 어쨌든 나는 얼씨구 좋다 하고 우리 집에서 꽤 먼 곳인데도 언니를 따라갔다. 그렇게 나는 피아노를 처음으로 배우게 되었다.
안타깝게도 은행장 사모님에 대한 기억은 전혀 없다. 다만 바이엘 교본의 노래를 따라 흥얼거리며 집까지 신나게 뛰어다니던 일은 기억한다. 그러다 학교에서도 피아노를 배울 수 있게 되었다. 이북에서 피란 온 정지영 선생님께서 나를 가르쳐주기 시작하면서부터다.
중학교 시절
중학교 때 만난 음악 선생님, 김경환 선생님이 기억에 남는다. 선생님은 평양에서 피란 오신 분으로 피아노를 치신 분이다. 남편 분은 대전 고등학교 음악 선생님이신 구두회 선생님으로 작곡가이셨다.
김경환 선생님은 매우 엄한 편이었다. 피아노 레슨을 게을리 하면 혼이 나서 매일 음악실에서 연습해야 했다. 그런 덕분에 가을 경연 땐 2등을 할 수 있었지만, 엄하신 한편으로 선생님은 자상하시기도 하셨다.
김경환 선생님은 이후 남편 구두회 선생님과 서울로 전근을 가시고 후임으로 이은순 선생님이 오셨다. 선생님은 성악 전공이신데 피아노도 잘하셔서 나를 가르쳐주시게 됐다. 그분께서도 정말 열정적으로 나를 가르쳐주셨다. 학교 성적이 떨어지면 안 되는데 피아노도 게을리 할 수가 없었다. 레슨비도 안 받고 가르쳐주시는 선생님들께 그렇게나마 보답하고 싶었다.
그 시절 내가 레슨비 안 내고 피아노를 배웠기 때문에, 학생들에게 레슨비 받는 것이 지금도 부담스럽게 느껴진다. 무얼 얼마나 가르쳤다고 개인적으로 돈을 받는 것인지…. 항상 편치 않았다. 학교에서 받는 월급과는 달리 개인적으로 받는 레슨비는 감사하면서도 늘 부담으로 남는다.
대학 생활
내가 대학교에 들어간 1960년엔 국가적으로 4·19혁명이 일어났고 연이어 2학년 때는 5·16 군사쿠데타가 일어났다. 4월 6일 입학식 며칠 후인 4월 19일. 강의실에서 피아노 연습을 하고 있는데 교무실 직원 선생님이 큰소리로 빨리 집에 가라고 하셨다. 영문도 모르고 학교를 나오니 전차도 다니지 않았다. 학교는 을지로 6가였고 우리 집은 원효로에 있으니 어쩔 수 없이 걸어야 했다. 서울역을 거쳐 2시만 만에 집에 도착했다.
그때 살던 집은 결혼한 큰오빠의 셋집이었다. 내가 집에 도착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언니가 들어왔다. 언니는 몹시 겁먹은 얼굴이었다. 서울역에서 경찰이 시위 학생들에게 총격을 가하는 모습을 보고 겨우 피해서 집에 왔다는 것이었다.
4·19로 희생된 학생 중에는 특히 서울대학교 학생이 많았다. 하루는 학생회장인 4학년 언니가 나를 찾아와 연주를 부탁했다. 4·19 희생자 위로 음악회가 음악대학 콘서트홀에서 열린다며 그 음악회에서 한 곡 연주해 달라는 것이었다. 마침 쇼팽의 스케르초 1번을 연습하고 있었는데 이 곡이 음악회 성격과 어울릴 것 같아 쾌히 승낙하였다.
졸업 독주회
졸업을 앞두고 학교에서 이전에 없던 졸업 요건이 생겼다. 이번 졸업생부터는 졸업 독주회를 해야 졸업할 수 있다는 것이었다. 우리 졸업반 학생들은 난리가 났다. 그때까지 한국 음악대학에서 학사 자격을 위한 졸업 연주는 별도로 없었다. 뜻하지 않은 졸업 조건이 붙게 된 것이었다.
독주회 프로그램을 짜 보니 지금까지 4년 동안 연습한 곡을 모으면 충분히 할 수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곡목을 교수님께 써 내고 연습했다. 프로그램을 만들어야 해서 교무처장이신 이성재 교수님께 여쭈었더니 학사 자격증을 위한 졸업 연주 규정을 만들어야 된다고 하셨다. 교수님을 따라 출판사도 찾아다니며 규격에 맞는 프로그램을 만들어 학생들에게 나누어줬다.
그러자 친구들이 나에게 원망을 퍼부었다. 자신들은 졸업 독주회를 안 할 것이라며, 연주를 시작하면 어떡하냐며 성화였다. 나는 학교에서 하라고 하니 당연히 해야 한다고 여겼다. 첫 공연이었던 내 졸업 독주회에는 정 교수님을 비롯해 많은 교수님이 찾아오셨다.
결혼과 부산 정착
초량동 신혼집
1965년 4월 나는 결혼 후 남편을 따라 부산 땅을 처음 밟았다. 우리가 도착한 수영공항은 수비 삼거리 땅으로, 바닷물이 한가로이 드나드는 넓은 해변가였다. 신혼살림은 초량동 산마루에 사시는 시댁에서 시작했다.
졸업 후 나는 장래 문제로 고민하며 진학이나 유학을 생각하기도 했다. 하지만 집안 형편도 어려웠고 스스로 전공을 살릴 만한 재주도 없다고 생각해 일찍 결혼을 결정했던 것 같다. 남편 하나만 따라 친구도, 친척 하나도 없는 부산이라는 낯선 곳에 온 것이었다.
시집오면서 내가 가져온 물건은 업라이트 피아노 한 대가 거의 전부였다. 경상도에는 색시 물건을 시댁에서 준비해주는 풍습이 있다고 하시며 침구까지도 일체 마련해 놓으신 터였다. 신혼살림을 차린 초량동 집은 산 중턱에 있었다. 지금은 옛 부산 부두가 매립되어 높은 빌딩에 가려졌지만, 당시만 해도 우리 집에서 초량 앞바다 멀리 등대 사이로 드나드는 배가 훤히 보였다.
1965년은 박정희 대통령이 베트남 전쟁에 한국군을 파병하기로 결정한 해이기도 하다. 부산 부두는 월남 파병군을 배웅하러 나온 사람들로 늘 북적였다. 우리 집에서는 사람들이 흔드는 태극기가 휘날리는 광경을 자주 볼 수 있었다.
삼성약국
내가 시집왔을 당시 남편은 범일동 부산진시장 입구에서 삼성약국을 운영하고 있었다. 약국이 잘됐는지 갑자기 상점을 늘려서 크게 개업을 했다. 약학대학 나온 친구는 있었어도 나는 약국에 대하여 아는 게 하나도 없었다. 확장 개업하는 날에도 나는 한복을 예쁘게 차려 입고 약국 한편에서 구경만 했다. 다행히 남편도 내가 약국에 나오는 걸 별로 달가워하지 않는 것 같아 약국엔 안 나갔다.
큰 약국을 운영하는 만큼 여러 제약회사 직원들이 드나들며 판매를 권했다. 그러다 보니 남편은 거의 매일 저녁 술이었다. 약국엔 평균 대여섯의 직원이 카운터를 지켰고 약사도 한두 명 있었던 것 같다. 삼성약국은 그 후 초량으로 이사하여 계속 하다가 대연동으로 이사 오면서 그만두게 되었다.
대학강사가 되다
부산으로 간다는 나에게 스승이신 정진우 교수님은 한성여대 김창배 교수님께 추천장을 써 주시며 한번 찾아뵈라고 하셨다. 산업대학을 거쳐 지금은 경성대학교가 된 학교이다.
결혼한 그해 봄, 나는 곧장 김창배 교수님을 찾아갔다. 김 교수님께서는 나를 반가이 맞아 주시며 1학기가 이미 시작되었으니 2학기에 강의 시간을 주겠다고 흔쾌히 말씀하셨다. 대학 강사는 꿈도 꾸지 않은 내게 이런 행운이 찾아오다니! 믿기지 않은 마음으로 다음 학기를 기다렸다. 일가친척을 떠나 부산에 온 내게 하나님꼐서 준비해주신 선물이 아닐까 한다.
부산에서의 첫 독주회
부산 소재 대학에 음악과가 신설된 것은 내가 부산에 오기 약 3년 전부터였다. 사립대학인 동아대학교, 부산여자대학교, 한성여자실업대학교 등 세 개 대학에 음악과가 거의 동시에 만들어진 것 같다. 그전엔 부산 교육대학에 음악 전공 파트가 있었을 뿐이다.
드디어 시작된 2학기, 나는 대학교 강사로 일주일에 두 번 정도 학교에 나가게 되었다. 당시 대학생들은 어려서부터 피아노를 치지 않았기 때문에 대체로 수준이 낮았다. 서울에서 이미 아이들을 가르친 경험이 많아서인지 강담에 서는 것은 재미있고 전혀 부담도 되지 않았다.
강사 생활에 적응하며 익숙해질 무렵 김창배 교수님께서 내게 독주회를 권하셨다. 교수님의 도움을 받아 독주회를 계획하고 대학 졸업 연주 때 했던 곡을 중심으로 프로그램도 쉽게 정했다. 문제는 독주회 장소가 없다는 것이었다. 당시만 해도 연주회를 할 마땅한 연주 홀조차 없던 시절이었다. 이번에도 김 교수님께서 도움을 주셨다. 부산일보 4층 강당에 업라이트 피아노가 있다며 그곳으로 장소를 정해 주신 것이었다.
독주회 날짜는 부산으로 시집온 해인 1965년 11월 22일. 첫 아이를 가지고 6개월 정도가 되어 배가 불러오는 참에 부산에서 가진 첫 독주회였다. 음악회가 거의 없던 시절이었는데도 제법 많은 사람들이 모였다. 클래식 음악이 그리웠던 시절 열린 피아노 독주회이다 보니, 비교적 관심 있는 청중이 모였던 것 같다. 그렇게 첫 독주회를 성황리에 마쳤다.
예술대학 학장 시절
2003년 신학기, 나는 예술대학장으로 임명을 받았다. 부학장은 무용학과 주수광 교수님을 임명했다. 해야 할 일이 태산 같았다. 예술대학은 교수님들의 교외 활동이 특히 많은 대학이다. 음악학과는 연주활동이 많아 음악회가 자주 열렸고, 미술학과는 작품 전시회 발표로, 무용학과는 공연으로 항상 게시판이 가득 메워지는 실정이었다.
학장이 된 나로서는 발표회장에 찾아가서 응원해드리는 일이 일과처럼 되었다. 나는 그것이 학장으로서 당연히 해야 할 일 중에 하나라고 생각했다. 그래야만 각 학과의 사정을 잘 알 수 있고 각각의 특성과 성격을 파악하기 쉬웠다. 시설 등 환경 시찰도 해야 했다.
실장님과 행정실 직원을 살피는 것도 내 일 중 하나였다. 매주 날을 정해놓고 행정실 직원들과 다과를 하면서 그들의 노고를 칭찬했다. 행정실 분위기는 항상 좋았다. 실장님과 예술관 창틀을 모두 갈아 끼우기로 계획하고 시설 과장님을 설득해 예산을 얻었고 예술관 건물 창틀을 모두 갈았다.
물론 음악학과 학생 지도도 게을리할 수 없어 연구실에도 많이 있었다. 밤낮없이 바쁜 중에도 연주를 하고 싶은 갈망을 놓지 않았다. 교내 연주홀에서 제자 대학원 학생과 듀오 연주를 하기도 했다.
당시 연주홀 환경이 얼마나 열악했는지 그때의 에피소드를 통해서도 드러난다. 그땐 겨울이었는데 연주홀에 히터가 작동되지 않아 청중들은 추위에 떨고 연주자들 역시 몹시 추운 가운데 연주를 해야만 했다. 나는 학장이 되고부터 기도문을 써 놓고 아침저녁으로 읽으며 음악학과가 쓸 건물을 지어 달라고 하나님께 기도드렸다.
그러다 2004년이 되었다. 1년의 학장직을 마치고 2년 차 새학기를 준비하며 예술대학 신학기 계획과 건의사항을 써서 총장님께 가져갔다. 이때 또 들고 간 것이 있다. 음악교육학과 졸업생들과 매월 만나면서 모은 회비와 후원비, 학부모 몇 분의 후원금을 모은 발전기금 1천2백만 원이었다.
그 작은 내 마음이 마중물이 되어 총장님과 통했던 것일까. 2월 말 새 학기 직전 학장회의 날 아침, 갑자기 총장님에게서 전화가 왔다. 교내 발전기금 60억 원이 들어왔는데, 그 돈으로 예술관을 짓기로 했다는 것이었다. 총장님께서 그날 학장회의에서 그 사실을 발표할 테니, 내게 말을 잘 하라고 전하셨다.
“아! 하나님은 내 편이시다! 할렐루야!” 나는 연거푸 하나님을 부르며 감사하는 마음으로 오후 학장회의에 참석했다. 총장님은 회의가 개최되자마자 예술관 건축 건에 대해 말씀하셨다. 총장님은 열악한 예술관 환경을 말씀하신 후 예술대학 학장인 내게도 한 말씀 하라고 하셨다.
나는 원고도 생각도 없이 얼떨결에 일어났다. 떨리는 마음을 겨우 진정하고 두서없이 말을 이었다. 뭐라고 얘기했는지 기억도 잘 나지 않는다. 그저 예술관 짓는 데 동의해주기를 바란다고 다른 학장님들께 간곡히 부탁했던 것 같다.
신기한 것은 학장님들 어느 누구도 말을 하지 않았다는 점이다. 하나님께서 다른 학장님들의 입에 자물쇠라도 채우신 것일까. 학장님들은 갑자기 들은 안건에 꿀 먹은 벙어리인양 한 분도 이견을 말씀하지 않으셨다.
마침내 총장님이 의사봉을 두드리시면서 새로운 예술과 탄생이 공식화되었다. 이 일에 대해 예술대학, 특히 음악학과 교수들까지도 믿어지지 않는 눈치였다. 그만큼 갑자기 일어난 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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